SEASON OF SECRETS
비밀의 계절
“어쩌면 당신도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을 두고도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알기 때문이다. 하얗게 비워진 사진 귀퉁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를 나도 알기 때문이다. 그 공허에 박제된 풍경을 두고 망설이는 동안, 다시 가슴으로 침투하는 모진 바람과 뼛속까지 엄습하는 겨울의 힘을 나 역시 느껴봤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홀연히 나타난 선 하나가 가장 아름다운 언덕이 되고, 무심하게 홀로 선 나무 한 그루가 삶의 꼭짓점이 되는 풍경. 광활한 우주의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까? 수시로 꿈틀거리는 하늘마저 태초의 것처럼 정리되지 못한 곳. 서둘러 내 안에 가두려는 욕심이 폭설처럼 내린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풍경이라 여겨지지만, 빈 것을 대하는 마음은 간단하지만 않다. 빈 공간에 놓여 자리 잡지 못한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아무 것도 없는 이유로 자꾸만 욕심이 난다. 사람들은 비워져 있는 것을 잘 참지 못해 버릇처럼 열심히 채운다.
비에이(Biei)를 떠올리는 내 입장이 조심스러워 졌다. 황창훈의 사진이 그렇게 만든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들은 나의 욕심이나 허영이었다. 솔직했다. 그가 대면한 계절, 온도, 풍경. 무엇보다 마음에 대해서, 슬며시 부풀리거나 현혹하는 자세는 없었다. 하늘 아래 가장 단순하고 깨끗한 풍경. 그런 곳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다고만 말 한다. 그랬을 뿐인데, 비밀스런 계절은 화면 밖으로까지 연장되는 듯하다. 한없이 넓고 평온하며, 따뜻하기까지 하다. 현자의 음성에 군더더기가 없는 것처럼, 공들여 가장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모호하게 이끌어낸 이미지마저도 그의 과거를 엿듣는 것처럼 끄덕여진다. 그는 사진 안에서 소년이었다가 청년이기도 했고, 간혹 나이를 잃고 자유로워져 자신 있게 자신을 만난다. 아무나 할 수 없다. 때로는 정직함이 주는 불편함이 있을 법 한데 그것마저 없다. 무리하게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애써 설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야기 할 뿐이다. 마주했던 사실에 대해서, 지켜보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음성이 급하지 않고 극단적이지 않다. 그래서 본다는 마음 보다 듣는다는 느낌이 더 강한 사진들이다. 눈의 언덕과 하늘의 경계에 늘어선 저 숲을 국경이라 여기고 건너온 여행자처럼, 허허벌판을 삼킨 입김마저 경험으로 들린다. 꾸밈없는 자세로 걸어온 시간들이, 내겐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비밀처럼 느껴진다. 사진들을 반복해서 보다보면, 하나의 감정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감정들이 다 있다. 환한 슬픔이 있고, 힘찬 부드러움과 거대한 고요가 있다. 넘길 때 마다 정지된 체 달리고 있다. 내가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다.
자신의 특별함을 과장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흔할까? 그는 자신의 사진처럼 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그 일들을 자신의 필체로 꾸준히 기록하는 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
그는 내게 사진으로 이야기했다.
“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마음의 힘, 그것이 삶의 가장 큰 비밀이라는 것을 ”
어쩌면 그것을 우리도 알고 있었다.